1. 반원개혁과 정치세력의 재편
고려와 원나라의 강화 이후 약 80년 동안 지속되었던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몽고족의 통치력이 약화되면서 한족(漢族)들이 각지에서 봉기하였고, 이와 때맞추어 고려에서는 1356년(공민왕 5)에 反元
인왕산과 안산
2. 답사 안내
우리는 서울지역의 민간신앙 유적을 인왕산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았다. 인왕산과 그 주변에는 많은 민간신앙 유적이 있는데 그 중 역사성이 있고, 민중들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국사당, 선바위, 여근바위, 남근바위를 선택하였다. 답사 경로는 다음과 같다.
‘맥락’ 문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고찰해 보려 한다.
여기서 ‘現實主義’라 함은 현실적인 삶의 문제와 관련하여 현실의 삶에 대한 애착과 아울러 현실의 부조리, 불합리에 대하여는 비판과 匡正의 의지로서 그 현실을 고양시켜 참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정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
국사 의천이, 의종 19년 및 명종 22년에는 지칭(智偁)이, 명종 10년에는 정각승통(正覺僧統)이 고시관을 했다는 기록을 통해 고시관은 각 종파의 고승이 겸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으나 무신집권 이후에는 간혹 유학을 닦은 과거급제자도 고시관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무신정변 이후 큰 화
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재 고려시대의 기록은 자료 유실로 알려진 것이 없고 조선 이후의 발자취는 소상히 남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원의 중창은 1456년(세조2년) 수미(守眉)왕사에 의해서였다.수미왕사는 왕실의 어명을 받들어 국가적 지원으로 966칸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을
왕사를 세워 화엄종을 본찰로 한 사실들을 보면 고려불교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의천이 태어나활동 하던 이 시기에는 특히 같은 선종과 교종을 통틀어 화엄종과 법상종을 비롯한 모든 종파의 갈등이 심화 됐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천은 원효를 해동보살로 추존하여 화쟁사상
왕사의 요일, 영통사의 각훈 등에서 균여의 계통인 개태사의 수기, 천기 등으로 법계가 교체되면서 화엄학의 내용이나 성격이 바뀌어 의천에게 비판받았던 균여의 화엄학이 재평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천태종에서도 역시 의천 직계의 덕소 등에서 백련사의 요세로 법계가 바뀌면서 禪과 구분되어 法
一. 이규보 李奎報 (1168 ~ 1241)의 칠언시 감상
【 작가의 삶 】
이규보는 고려 의종 22년(1168) 음력 12월 16일에 당시 황려현(黃驪縣)으로 부르던 오늘의 경기도 여주에서 호부시랑을 지낸 이윤수(李允綏)와 김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주. 초명은 인저, 자는 춘경(春卿)이었으며, 아호는
1. 머리말
일찍이 최남선은 일연의『삼국유사』를 두고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누가『삼국유사』를 출발점으로 하지 않고서 조선의 신학(神學)을 말하며,
조선의 신화학(神話學), 고사신화(古史神話)등을 말하며, 고어학(古語學),
지명학(地名學), 문학사, 사상사, 종교사를
1. 들어가며
한국사상사 수업에서 한국 사상가의 평전을 쓰라는 과제를 받고서 차차 하리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나는 도서관에 가서 한국 사상사를 다룬 책 중 몇 권을 뽑아들게 되었다. 기왕에 서가 앞에 섰고 이제 조금씩 과제준비를 해야 했으며, 그러려면 먼저 어떤 사상가를 선정